부활의 아침을 열면서...
사람이 갖는 공포 가운데 죽음은 단연 앞선다. 그래서일까? 예나 지금이나 죽으면 끝이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팽배하다. 심지어 죽음의 권세 앞에는 항우장사라 할지라도 벌벌 떨 수밖에 없다. 죽음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현실이며, 보편적 삶이다. 그런데 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달라야 한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나의 과정으로서 받아들여야지, 모든 것이 끝이라는 마지막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실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은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으로 말씀한다. 죄성(罪性)이 지배하는 육신을 입고서는 갈등을 벗어날 수 없다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에 경험하는 영화(glorification)라는 영광스러운 단계가 있음을 성경과 신학의 구원론에서 언급하고 있다. 영화를 경험하는 자는 성도에 한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이 있는 이라면 장차 경험할 아름다운 죽음이 삶에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다고 여긴다. 이런 인식이 수반될 때만이 기대에 찬 죽음이요, 그 후에는 상급이 기다리고 주를 만날 소망에 찬 경험이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는 말씀이 이를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남’이다. 고난 속에서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삶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자는 온전한 모습으로 인생을 통과하며 예수 생명을 씨 뿌리듯 뿌리는 삶을 산다. 아울러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부활의 소망으로 당차게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세상을 향해 당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는 힘으로 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 모두는 반드시 떠나 갈 인생이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게 두려운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말이 생각나는 부활의 아침이다.
구암동산 하늘문지기 허영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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